11.청조말기와 민국초기에 연변조선족의 반봉건투쟁
중국조선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1년 10월 28일
청조말기와 민국초기에 연변조선족의 반봉건투쟁은 어떻게 벌어졌는가?

청조말기와 민국초기의 조선족인민들의 반봉건투쟁은 그주되는 내용이 관료배들의 억압, 략탈과 가렴잡세를 반대하며 민족적멸시가 안받침되어 있는 《입적비》의 강제적징수를 반대하는것이였다. 때문에 주되는 투쟁대상은 지방관청과 관청의 보호밑에 있는 향약(鄕約), 패두(牌頭)들이였다. 투쟁의 주되는 형식은 폭동이거나 청원운동이였다.

1899년 4월, 조선족광부 박선(朴善)은 천보산은광 광부들을 조직하여 관료배들의 봉건적수탈을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 은광은 서태후로부터 《훈춘천보산광무국》으로 명명받은, 당시 동북에서 가장 큰 은광이였다. 당시 관료배들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인신자유도 주지 않았으며 채찍으로 강박로동을 시켰다. 게다가 련속 넉달째 로임도 내주지 않으면서도 이에 불만정서가 있는 노동자들을 탄압하려고 하였다. 이때 박선은 김룡선, 류순자, 장옥명 등 200여명의 조선족, 한족 노동자들을 뭉쳐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대오는 광업주의 집을 습격하고 그자들의 돈궤를 짓부신후 돈을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집을 태워버렸으며 용광로를 짓부시고 창고를 불태워버렸다. 전반 광산은 대뜸 마비상태에 빠져 부패한 청조관청을 놀래웠다.

1908년 3월에 국자가(연길) 북쪽근교의 조선족농민들은 백성을 억누르고 가렴잡세를 강요하는 향약, 패두들을 철직시켜달라는 청원운동을 벌렸다. 그들은 연길당국에 향약, 패두들의 죄행을 고발하고 련속 며칠동안 관청을 포위하고 청원하였다. 민중의 압력에 눌리운 관청에서는 사태가 더 심하여질가봐 두려워 민분이 큰 향약과 패두를 철직시켰다. 반관청투쟁에서 승리한 국자가 조선족농민들은 자신의 권익을 보위하기 위해 《농무계(農務契)》라는 단체를 내왔다.

1914년 1월초에 국자가의 순경들은 국자가 서쪽교외의 상발원(祥發源)에 와서 조선족 집집마다에 《일적비》를 내라고 강박하였다. 이에 분개한 상발원농민들은 줄을 지어 국자가에 있는 《동남로관찰사서(東南路觀察使署)》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연길현, 화룡현 각지에서 온 조선족민중 수백명과 합세하여 관청을 포위하고 《입적비》강요자들을 처벌해달라고 청원하였다. 관청에서는 군대를 풀어 군중 30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더욱 격분한 군중들은 련속 며칠동안이나 앉아버티기운동을 벌렸다. 이에 질겁한 관청에서는 체포한 군중들을 석방하고 해당인원들을 처벌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 운동은 민족억압정책을 실시한 관청을 타격하였으며 인민대중의 단결의 힘을 또 한번 과시하였다.

1914년에 화룡현 지사 양배조와 토호 진청장은 서로 결탁하여 전 현 조선족들에게 입적비를 강요하였다. 이에 분개한 화룡현 조선족인민들은 그자들의 죄행을 연길심판청에 고소하고 옹근 1년동안이나 그자들을 철직시켜줄 것을 청원하였다. 양배조와 진청장은 조선족인민들의 압력에 못이겨 끝내 화룡현을 떠나고 말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