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청조말기에 조선족집거지역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중국조선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1년 10월 20일
조선족은 비록 일찍부터 중국 동북으로 이주하여 왔으나 역사적인 제한성으로 하여 자기의 민족집거지역을 형성하지 못하고있다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19세기후반기에 와서야 두만강북안인 연변과 압록강북안인 동변도지구에 집거지역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명말청초에 이주한 수만명 조선인들은 청조통치배들의 강박밑에 팔기군이나 요동 각지의 왕공귀족들의 농장에 배치되어 분산거주하게 된데다가 봉건적인 페쇄정책밑에 인신자유마저 없다보니 대외와의 련계가 단절되고 다른 민족들속에 섞이여 살게 되었다. 특히 1644년 청군이 관내로 쳐들어가자 팔기병이나 왕공귀족들에게 예속된 조선인들은 청군을 따라 관내에 들어가 전국각지에 널리게 되었다. 다만 요동지역이나 만리장성이북의 각지 농장에 집체로 남아있던 극히 개별적인 자그마한 조선족부락의 주민들이 줄곧 남아있으면서 조선족의 특성을 보전하고있었으나 집거지역은 형성하지 못하였다.

청조가 장백산이북의 500킬로메터 지역을 봉금한후 《범월잠입》한 조선인들은 신분이 발각되기만 하면 송환되거나 극형을 받게 되므로 깊숙한 산속에 숨어 살거나 한족, 만족지주집에서 끼살이를 하면서 치발역복하고 분산거주하다보니 집거구를 형성할수 없었다.

1840년대경에 청조의 봉금이 풀리기 시작하자 조선북부의 빈곤한 농민들이 압록강, 두만강 상류의 북안에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는 1860년대 조선의 리재민들이 대폭적으로 동변도와 연변지역에 이주하여 오면서 조선족부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72년, 압록강상류인 장백, 집안, 림강 등지에는 이미 20여개 조선인부락에 수천명의 이주민들이 정착하였고 《회상제》라는 자치조직까지 내왔다. 1875년, 청조가 동변도지구를 개방하면서 조선족이 거주하고 경작하는 것을 묵인하자 조선의 수많은 농민들이 동변도지구로 이주하여 와서 분산적이나마 본민족의 집거지역을 형성하였다. 1881년에 이르러 장백, 림강, 집안, 통화, 환인, 관전, 신빈, 안동 등 압록강 북안의 8개 현에만 하여도 28개 면(面)이 설치되었고 1897년에는 8,722세대에 3만 7,000여명이 거주하였으며 1903년에는 37개부락에 1만 6,357세대, 5만 5,590여명이 거주하게 되었다.

두만강북안 연변에도 일찍부터 조선족들이 이주하여 왔다. 청조가 봉금정책을 철페할 때였던 1881년에 가야하어구로부터 삼합의 고령진까지의 구역만 하여도 8개 지역이 조선족이주민에 의해 개간되었고 수천세대의 조선족들이 2천여헥타르의 땅을 경작하고 있었으며 훈춘의 밀강, 경신과 동오도구 등 지구에도 수천명이 이주하여 정착생활을 하고있었다. 당시 청조에서는 화룡욕(和龍?, 지금의 룡정시 지신향)등 몇곳에 설치된 통상국내에 월간국(越墾局)을 세우고 조선인들의 이주에 대한 관리를 겸하게 하였으며 두만강북안에다 조선인들의 《전문개간지역》을 확정하고 경제면에서도 우대정책을 실시하여 많은 이주민을 끌어들였다.

조선인개간지역의 확정은 청조가 연변에 있어서의 조선인들의 거주, 경작의 합법적권리를 승인하는것으로 되었으며 연변지구에서의 조선족민족공동체의 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선족의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놀았다.

1894년 남강(연길)에 무간총국이 설치되자 조선족이주민들은 해란강을 넘어 연변 각지에 부단히 이주하여 왔다. 1907년에 이르러 연변지구(훈춘현을 제외)에는 조선족부락이 529개에 달하였는바 1만 5,356세대, 7만 2,076명이 거주하여 연변 총인구의 76%를 차지하였다. 이는 동변도지구의 조선족인구를 훨씬 초과 하였다. 그후 조선족인구가 줄곧 불어 연변은 중국조선족의 최대집거지역으로 되었으며 따라서 조선족문화중심지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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