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고구려와 발해 시기에 우리의 선조들은 동북에서 논을 풀고 벼농사를 하였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된 후 료, 금, 원, 명, 청 몇 개 왕조에 걸쳐 무려 900여년간 동북에서 벼농사를 했다는 역사적기재가 없다. 19세기 중엽부터 많은 조선족들이 동북으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동북에서는 논농사가 다시 시작되었는바 조선족은 근대 동북논농사의 개척자였다.
1875년에 통화지구의 상전자, 하전자 일대에 정착한 조선족농민 들은 소택지나 수렁을 논으로 개답하고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이는 근대동북수전개발의 첫 시작이다. 논농사바람은 여기로부터 흥경, 환인 등 여러 지구로 불어갔다.
료하, 혼하 일대의 봉천(심양), 신민 지역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논농사는 1908년에 김시정(金時禎)등 조선족농민 5~6명이 신민현 서공태보(西公太堡)의 황무지 10헥타르를 소작 맡아 개답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1914년에 봉천당국은 조선족농민 김중삼의 건의에 따라 《봉천수리국》을 세우고 조선족농민 들을 조직하여 13킬로메터나 되는 물 도랑을 빼고 혼하 물을 끌어들여 1천 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이렇게 일어난 논 농사바람은 봉천, 신민으로부터 재빨리 무순, 개원, 철령, 길림쪽으로 불어갔다.
애하(愛河), 대양하(大洋河) 류역의 논농사는 1890년에 두 조선족농민이 안동(단동)부근의 탕산성(湯山城)에서 수전을 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어 봉황성, 수암(岫岩), 송수 일대로 확대되었다.
휘발하상류 ,혼하상류의 논농사는 1883년에 통화일대의 조선족이 류하현에 이주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료하연안 수전농사의 중심지였던 영구의 전장대(田庄台)의 논농사는 1913년에 조선족농민 김원우 등이 200~300헥타르의 땅을 소작맡아 개답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두만강북쪽 연변지구의 수전은 1900년에 룡정동쪽의 세전벌과 룡정남쪽의 대교동 조선족농민들로부터 개간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10년대에 논농사는 평강벌, 부르하통하, 가야하, 훈춘강 연안으로 확대되었다. 1920년에 이미 3,700헥타르의 논을 개간한 연길현은 동북에서 논이 가장 많은 현이였다.
1900년에 조선족농민 김지순 등이 덕혜현 남령자(南?子)에 1.5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이것이 길림, 장춘 지역의 첫 수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만의 수전은 1911년에 안종호를 비롯한 89세대의 조선족농민들이 동녕현 소수분하에서 150년헥타르의 논을 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수전농사는 여기로부터 목릉, 녕안, 해림 방면에로 확대되었다.
1920년의 통계에 따르면 봉천지구 수전의 85%, 안동지구 수전의 70%, 길림지구 수전의 100%, 북만수전의 100%, 개원지구 수전의 90%, 통화지구 수전의 85%, 무순지구 수전의 80%, 연변지구 수전의 100%는 모두 조선족이 개간하고 다루었다. 1934년의 통계에 따르면 동북 벼 총수확고의 90.1%가 조선족농민에 의해 생산되었다.
《이밥은 뼈밥》이라는 말이 있다. 일제의 억압과 군벌당국의 략탈을 받던 조선족농민들의 수전개발사는 악전고투의 력사이며 피눈물의 력사였다. 조선족농민들은 인간의 발자취가 닿아본적이 없는 험한 초지, 림지나 수렁을 다스려야 했으며 얼음이 서걱거리는 강물에 들어가서 보를 막고 물도랑을 빼야 했다. 바로 이렇게 조선족농민들이 피땀을 흘린 보람으로 태고연히 잠자던 동북의 초지, 습지들이 옥답으로 변하였고 수리관개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입살을 수입하던 동북은 본세기 10년대말부터 입쌀을 수출하게 되었다. 실로 조선족농민들에 의해 시작된 동북의 논농사는 근대동북의 농업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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