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청조 때 어떤 유명한 조선족 인물들이 있었는가? |
중국조선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1년 10월 13일 |
1644년에 청조 팔기군이 관내로 진군할 때 팔기 군에 있던 많은 조선족관병 들도 관내로 들어갔다. 북경주둔 팔기병가운데서 제1고려좌령(佐領), 제1기고좌령, 제2고려좌령, 제12좌령, 제14좌령 등은 모두 조선족들로 이루어진 좌령들이었다. 관내에 들어간 조선족관변 중에는 싸움가운데서 용솟음쳐 나온 명장들이 적지 않았으며 문화계, 정계에도 저명한 조선족들이 있었다. 유명한 무관 리사충(李思忠)은 조선족이었다. 그는 1644년에 팔기군을 거느리고 섬서로 쳐들어가 동관을 점령하였고 강남으로 진군하여 양주를 함락하였다. 장강남북 10개 주, 현의 반청세력을 숙청한 그는 그 후 지방의 최고군사장관인 섬서제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 리음조(李蔭祖)도 많은 공을 세워 청조의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있었다. 리음조의 아들 리병(李炳)은 강희년간에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있다가 그후에는 지방의 최고행정장관인 안휘성 순무(巡撫)로 되었다. 리사충의 셋째 아들 리현조(李顯祖)는 강희년간에 광동수사제독(水師提督)으로 있었다. 한걸은(韓杰殷)은 청조초기에 《1등경차도위(輕車都尉)》로 있은 한니(韓尼)의 아들로서 정홍기만주부도통(正紅旗滿洲副都統)으로 있었으며 강희년간에는 수도위수최고장관인 호군통령(護軍統領)으로 있었다. 그의 동생 한나진(韓那秦)은 흑룡강부도통으로 있었다. 청조초기 정황기 제4참령(正黃旗第四參領) 제2고려좌령인 김신달의 외손자 상명(常明)은 건륭년간에 령시위내대신(즉 궁전 내무대신)까지 하였고 태자태모의 벼슬을 추가 받았으며 사망된 후에는 건륭황제로부터 의근(懿勤) 이라는 익호까지 하사받았다. 청조초기에 《고려인》으로 불리 운 김간(金簡)은 저명한 학자였다.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진용의 부총재직을 맡은 그는 조선의 동활자를 모방하여 대추나무로 활자를 만들어 무영전(武英殿)의 취진판(聚珍版) 2,891권을 간행하였다. 그는 건륭황제로부터 《김가씨(金佳氏)》란 성을 하사받았고 1792년에는 리부상서(吏部尙書)로 되었다. 그의 여동생은 건륭황제의 귀비로 되었다. 안기(安岐)는 강희년간에 북경에 이주해 온 청조의 권위적인 서화(書畵)감상가이며 서화수집가 였다. 《중국인명대사전》에는 서화의 수집, 보관면에서 안기를 초과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가 편찬한 《묵연휘관(墨緣?觀)》이란 책은 진당(晉唐) 이래 서화의 지묵(紙墨), 인장(印章)의 진가(眞價)여부를 감정하는 권위적인 저서이다. 생전에 많은 서화를 건륭황제에게 바친 그는 건륭황제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은 천냥까지 상금으로 받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대부분 서화작품은 건륭황제의 내부(內府)에 소장되었다. 청조 말기인 광서(光緖)년간에 세속(世續)이라고 부르는 이름난 조선족이 청조 정치무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조선의주사람으로서 성은 김 씨이다. 1875년 거인(擧人)으로 되고 박식다학으로 소문난 그는 1896년에 총관내무대신 겸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되었고 그 후에는 종1품 벼슬인 협판대학사(協辦學士)로 있다가 군기대신(軍機大臣)으로도 있었다. 1909년에 선통황제가 즉위하자 그는 퇴직하고 자정원(資政院) 총재의 신분으로 《덕종실록(德宗實錄)》의 편찬에 종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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