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명말 청초시기의 세 개 《박씨촌》은 어떻게 생겼는가?
중국조선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1년 10월 13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중국조선족역사는 약 100여년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대략 370여년 전부터 박 씨성을 가진 조선족들이 하 북성 청룡현 박장자촌(지금은 탑구와 맹가와포촌)과 요녕성 개현 박가구촌, 요녕성 본계현 박보촌에 살고있었다는 사실이 80년대 후반기의 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그럼 이러한 《박씨촌》들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박 씨네 선조들은 어느 때 어디에서 이곳에 와서 정착하게 되었는가?

명조와 청조가 교체하는 시기에 후금의 누르하치와 청태조 황태극은 일련의 대내외 정책을 일으켰었다. 그 중 1619년 명조와의 싸르후전역과 1627년의 《정묘호란》 및 1636년의 《병자호란》 때의 2차에 걸친 조선침략전쟁에서 후금은 조선사람들을 대량적으로 포로하여 만주팔기 군에 편입시켰다. 《만주팔기씨족통보》에 따르면 팔기내의 조선인 성씨는 모두 43개였는데 박씨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이로 보아 박씨촌의 선조들은 명말 청초의 전란에서 포로 된 사람들이 틀림없다.

전하는데 의하면 하 북성 청룡 현에 사는 박 씨네 선조들은 팔기군에 편입되어 그들을 따라 관내로 들어갔다가 청조 순치년간의 《궁정정변》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박장자라는 곳에 정배되었다가 다시 지금 살고있는 곳에 와서 정착하였다고 한다. 요녕성 개현과 본계현에 살고있는 박 씨네 선조들은 후금에 의해 점령된 요동, 요남 일대에 설치된 만주왕공귀족의 농장에 농군으로 분여되어 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청조가 포로나 노략한 조선인, 한족 등을 왕공귀족장원의 농노나 가정노예로 만들었다는 역사문헌기재와 맞는다.

박씨족보에 따르면 지금까지 그들은 중국에서 이미 15~16세대를 살아왔다. 만약 한 세대가 25살 좌우의 차이라면 그들의 제1세대가 중국에 정착한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370여년전인 명말 청초시기가 된다.

사회적 및 역사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몇백년래 박씨촌의 사람들은 세세대대 내려오면서 자기의 족적을 속여왔다. 그들은 청조 때 민족적 차별시와 압박을 받지 않기 위해 족적을 만족으로나 한족으로 고쳤다. 그들은 비록 오랫동안 자기의 언어와 문자 및 풍속습관을 잃고 족적까지 속이고 살아왔지만 자기들이 조선민족이라는 점만은 잊지 않고 건국이후 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족적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때문에 숙망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공산당 11기 3차 전원회의 이후 당의 민족정책이 시달됨에 따라 박씨주민들은 1982년에 실행된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를 계기로 자기의 원래 민족성분을 회복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지 정부에서는 국무원 인구조사소조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민족성분을 회복하거나 고치는 문제의 처리원칙에 관한 통지》에 규정된 원칙에 좇아 거듭되는 조사와 확인을 거쳐 상술한 박씨촌주민들의 조선족족적을 회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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