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저격사건 5대 의혹


① 1974년 8월15일 오전 10시23분께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를 향해 총을 쏜 뒤 객석에서 내민 발에 걸려 넘어지기 직전 오케스트라석 분리대를 짚고 단상으로 권총을 겨냥하고 있다.
② 육영수씨가 총격을 받고 단상의 의자에 쓰러져 있다. 권총을 들고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은 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다.
③ 육영수씨가 쓰러진 단상의 의자 주변을 정부 인사들이 둘러보고 있다.
④ 검찰에 송치된 문세광
⑤ 8월19일 열린 육영수씨 국민장에서 장례행렬이 광화문을 지나고 있다.
⑥ 일본이 문세광 사건 수사에 성의를 보이지 않자 당시 전국에서 규탄대회가 계속됐다.

* 사진의 출처는 ①③④⑤ <보도사진연감>, ② <조선화보>, ⑥ <신동아>

1974년 12월20일 저격 사건의 범인인 문세광의 사형집행이 서울구치소에서 이뤄졌다. 사건발생 127일, 형 확정 뒤 사흘만이었다. 당시 정부 당국은 사건 발생 불과 이틀만에 “북괴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한 암살 시도 사건”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올해로 사건이 일어난지 30년을 넘겼고, 사건을 둘러싼 30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그러나 신장 180㎝, 80㎏의 거구에 지독한 근시이며 권총사격 경험이 전무하다는 암살범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을 둘러싼 의문은 오히려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 육영수씨는 누구 총에 맞았나 =저격 사건을 둘러싼 의혹의 출발점은 ‘정말 육영수씨가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았느냐’는 것이다.

수사결과 현장에서 발사된 총알은 모두 ‘7발’이었다. 문씨의 총은 5발을 장착할 수 있는 스미스 앤 웨슨(일명 리볼버)이었고, 수거된 총에 한 발이 남아 있어(공식발표로는 ‘불발’) 총 4발을 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서도 1탄은 자신의 허벅지에(오발), 2탄은 연단 왼쪽에, 3탄은 불발, 4탄은 육영수씨에게, 5탄은 연단 뒤 태극기에 맞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수사를 담당했던 고 이건우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은 지난 89년 9월 월간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문씨가 쏜 총알은 1탄은 오발, 2탄은 연단, 3탄은 태극기, 4탄은 천장에 맞았다”며 “현장 검증 전 청와대 경호실에서 탄두를 미리 수거해 가 탄두를 확보 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문씨의 네 번째 탄환은 천장에 맞았는가 아니면 육씨에게 맞았는가?

또 경호원이 응사한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숨진 장봉화양에 맞았다면 나머지 두 발은 어디로 갔는가? 이 계장은 경호원이 쏜 총알에 육영수씨가 맞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 육영수씨의 총상 위치=문세광은 B열 맨 뒷 쪽, 즉 연단 왼쪽에서 뛰어나오며 총을 쐈고, 육씨는 연단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따라서 육씨는 머리의 정면 혹은 오른쪽 부위에 총을 맞았어야 하고, 물리적 법칙에 의해 머리는 반대편인 왼쪽으로 기울어야 한다. 하지만 사건 당시를 생중계한 미국 <시비에스 방송>의 녹화 테이프를 보면 육씨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었다. 문씨가 아닌 ‘제 3의 인물’에 의한 저격설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문세광은 검문으로부터 보호받았다?=대통령이 참석하는 공식 행사장에 문세광은 입장 허가증인 ‘비표’도 없이 어떻게 제지당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을까? 93년 5월 월간 <길>과 인터뷰한 한 검문 경찰은 “당시 장충동 극립극장 앞 차도에는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며 “하지만 행사 전 날 청와대 경호원이 ‘입구에선 검문하지 말고 올려보내라’고 해 계획이 변경됐다”고 말했다. 청와대 경호과장의 지시였다. <동아일보> 76년 10월25일치 기사를 보면 재판장에서 직무유기로 구속돼 피고인이 된 최종환 당시 중부경찰서 정보과장은 “비표를 달지 않은 문세광을 로비에서 검문하려 했으나 장성준 청와대 경호계장이 ‘어느 장관을 만나러 온 사람’이라고 했다”며 “장 경호원이 잘 아는 재일교포로 생각하고 들여보냈다”고 진술했다. 청와대 경호과장과 경호계장은 결과적으로 문을 경찰의 검문에서 보호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으로 도피했다”고 당시 경찰들은 전하고 있다.

◇ 한국과 일본의 수사결과가 전혀 달랐다=문세광이 가짜 일본인 여권을 이용한 것으로 드러나자 정부는 일본에 강력한 수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양 쪽 정부의 수사결과 발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된 75년 2월 <신동아> 기사를 보면 일본 쪽 수사결과는 매우 달랐다. 정부는 문씨에게 남편 명의의 가짜 여권을 만들어준 요시이 미키코라는 일본여성을 공범으로 지복했지만 일본은 그에게 집행유예의 가벼운 처벌만 했다. 또 문씨의 배후로 우리 정부는 총련 정치부장인 김호룡씨 등을 거론했지만 일본은 뚜렷한 단서가 없다고 발표했다.

우리 쪽은 문씨가 74년 5월5일 오사카항에 정박 중이던 ‘북괴 공작선 만경봉호’에서 공작원을 만나 암살 지령을 받았다고 했지만 일본은 확인 결과 승선명부에 이름이 없다고 밝혔다.

◇권총 도난의 수수께끼=정부 수사발표로는 문씨는 ‘북괴 공작원’으로부터 암살 지령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무기 입수를 위해 일본 파출소에 침입해 권총 2정을 훔치는 모험을 감행했을까?

네명의 경찰관이 자고 있는 파출소의 자물쇠를 열고 권총을 훔쳤다고 문씨가 자백했지만 현장에 남은 지문과 발자국이 문씨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물적증거에서 문씨의 권총절도는 입증되지 않고 있다. 또 저격사건 뒤 문씨의 집을 수사했더니 거사를 한 범인답지 않게 증거품들을 없애기는커녕 보란듯이 넘쳐났다고 한다.

<한겨레> 사회부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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