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세광 저격사건 5대 의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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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사건 발생이후 문세광씨는 1∼3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사건 발생 128일만인 1974년 12월20일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사건 현장인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발사된 총탄이 모두 몇발이냐에서부터 시작된 논란은 핵심 관련자 대부분이 사망한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의혹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지만 대중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육영수 여사, 과연 문씨 총에 맞았나' =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의혹은 육영수 여사가 과연 세간에 알려진 대로 문씨가 쏜 총에 맞았느냐 여부다.
당시 수사발표에 따르면 사건 당일 현장에서 울린 총성은 모두 7발. 문씨는 5발이 장착되는 스미스 웨슨(일명 리볼버) 권총을 사용했고 범행 뒤 한 발이 권총 약실에 남아있어 모두 4발을 발사한 것으로 결론났다.
대법원의 문씨에 대한 사형 판결문도 문씨가 발사한 1탄은 오발(자신의 허벅지), 2탄은 연단, 3탄은 불발, 4탄은 육 여사, 5탄은 태극기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불발탄이 권총 약실에 남아있었고, 따라서 총성이 안울렸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수사본부 요원이었던 고(故) 이건우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은 사건발생 15년이 흐른 지난 89년 월간『다리』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뒤집는 증언을 했다.
그는 "현장검증 전 이미 청와대 경호실에서 탄두를 수거해갔다"며 탄흔에 기초해 제1탄은 오발, 2탄은 연단, 3탄은 태극기, 4탄은 천장에 맞았다고 주장했다.
이를 비교해 보면 일치하지 않는 한 발을 두고 수사발표에서는 육 여사를, 이 계장은 천장을 맞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립극장을 크게 울렸던 7번의 총성 중 문씨에 의한 것이 아닌 나머지 3발을 과연 누가 어디에서 쐈느냐가 완전 규명되지 않았다.
경호원이 쏜 총탄이 합창단원 장봉화양을 맞췄지만 나머지 두 발의 `행적'이 묘연한 것이다. 당시 탄착지점은 오발로 인한 문씨 자신의 허벅지, 육 여사, 합창단원 장양, 연단, 태극기, 천장 등 모두 6군데였다. 수사발표에서의 7번의 총성과는 다르지만 불발탄을 계산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수사발표대로라면 경호원이 쏜 총탄 중 2발은 천장과 장양을, 이 계장의 주장대로라면 `제3자'의 총탄 중 2발은 장양과 육 여사를 향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제3의 저격수 있었나' = 육 여사는 관객석에서 바라봤을 때 연단의 우측에 앉아 있었다. 문씨가 행사장 좌측 뒷자석에서 앞으로 뛰어가며 총탄을 발사했기 때문에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 여사의 머리는 좌측으로 기울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저격 뒤 육 여사의 머리는 우측으로 넘어와 있었다.
`제3의 저격수'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는 대목이다.
또 문씨의 저격 뒤 무대 왼쪽에서 한 명이 단상위 육 여사 쪽으로 뛰어올라가 여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뒤로 숨는 듯한 모습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경호원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한 명이 앞서 올라간 사람 뒤에서 권총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총구가 육 여사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출입비표 없이 대통령 행사장에 들어갔다?' =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대통령 행사장에 출입비표도 없이 들어갈 수 있을까. 문씨는 행사 당일 포드20M이라는 고급 리무진 한 대를 전세내 행사장에 도착했다. 당초 행사장에는 수많은 경찰이 배치됐고, `승차입장'이라는 비표가 없는 차량은 통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행사장으로 향하는 차량을 검문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져 문씨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극장안으로 들어갈 때 역시 검문이 없었다. 청와대 경호과장이 검문완화 지시를 전날 내렸고, 극장 로비에서 문씨가 청와대 경호계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권총까지 소지하고 있던 문씨가 비표도 없이 차량을 행사장에 진입시키고 극장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의혹을 남기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문씨가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트랜지스터 라디오 케이스에 숨겨온 권총이 적발되지 않았고, 일본인 명의의 위조여권을 사용했는데도 재일동포 비자를 받아 입국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의혹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너무나도 다른 한-일 수사결과 발표' = 사건발생 직후 문씨가 일본인 가짜여권을 이용해 입국한 재일교포라는 점 등으로 일본도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이 발표한 수사결과는 다른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한국측은 남편 명의의 가짜 여권을 문씨에게 만들어 준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라는 일본 여성을 공범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일본측은 그녀를 여권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집행유예라는 가벼운 처벌만을 했다. 문씨의 배후와 관련, 한국측은 조총련 정치부장인 김호룡씨 등 수명을 거론했지만, 일본측은 뚜렷한 단서를 잡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측은 문씨가 74년 5월5일 오사카항에 정박 중이던 `북괴' 공작선이자 무역선인 만경봉호에 승선, 공작원으로부터 박 대통령 암살 지령을 받았다고 발표했지만 일본측은 참의원 법무위 정부답변에서 승선명부에 이름이 없다고 했다.
또 문씨가 입국 직전 일본 아카후도(赤不動) 병원에 가명으로 위장 입원해 한 달간 `특별훈련'을 받았다고 한국측은 발표했지만 일본측은 병실이 7인실이기 때문에 특별한 학습이나 훈련을 받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있나' =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김대중씨 납치사건과 연계지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건 1년 전인 1973년 8월8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언론은 중앙정보부 관련설을 제기했고, 일본정부도 일본 주권을 침해한 사건이라며 한국정부를 강력 비난했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특사로 일본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미국에서도 한국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나오면서 박정희 정권이 상당한 압력을 받던 시기에 바로 저격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일본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자 일본은 자민당 부총재가 수상의 친서를 가지고 한국을 방문하는 등 상황은 역전됐다.
이와 관련, 문씨는 당초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 산하단체였던 한청에서 활동했고, 이후 민단이 김대중씨와 연결된 한민통으로 분리됐고 한청 역시 한민통 산하단체로 변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정한 직업이 없던 문씨가 어떤 세력에 의해 포섭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포섭했고, 왜 그랬을까.
(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 honeybee@yna.co.kr 2005년 1월 20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