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기

삼성기 전 상편

우리 한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 800이 흑수 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은 또한 감군으로서 천계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사 올 것을 알며 상을 잡으사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스러운 이들과 뭇철인들이 보필하도록 하시더니 웅씨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어�.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겐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거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황(B.C.246-206)때 신인이신 대해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

정미(B.C.194)년 한나라 혜제(B.C.195-188)때 연나라의 추장이었던 위만이 은근히 서뱁고 변두리 땅의 한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의 준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했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B.C.108)년 한나라의 무제(B.C.141-87)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고 했다.

을미(B.C.86)년 한나라 소제(B.C.87-74)때, 부여의 옛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삼성기 전 하편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타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읜 구한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옛날 한국이 있었나니 백성은 부유하였고 또 많았다. 처음 한임께서 천산에 올라 도를 얻으시사 오래오래 사셨으니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널리 교화하시니 사람들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싸울 일도 없게 하였으며, 누구나 힘껏 일하여 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다음에 혁서 한임, 고시리 한임, 주우양 한임, 석제임 한임, 구을리 한임에 전하고 지위리 한임에 이르더라. 한임은 혹은 단임이라고도 말한다.


옛글에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미구여국, 사납아국, 선비국, 수밀이국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 북해라 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의 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할 곳이로다] 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오가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찌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하니 마침내 천부인 세 가지를 내려 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묘,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이라 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했다.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을 주관하고, 선악을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때에 한 곰과 한 범이 이웃하여 살더니 일찌기 신단수에서 빌었다. [원컨대 변하여 신계의 한 무리가 되어지이다]하니, 한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가르쳐 줄지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술로써 몸을 바꾸고 정신을 바꾸었다. 먼저 신이 만들어 놓은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내놓았으니 즉,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라. 이에 경계하여 가로대 [너희들 이를 먹고 햇빛을 백 일 동안 보지 않으면 쉽사리 인간다움을 얻으리라]하니, 곰과 호랑이의 두 무리가 모두 이를 얻어 먹고 삼칠일 동안 기하였는데 곰은 기한을 잘 지켜서 타이름을 따르매 모습을 얻게 되었지만, 범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금지하는 바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이들의 두 성질이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라. 웅녀는 더불어혼인할 곳이 없었으므로 단수의 무성한 숲 밑에서 잉태하기를 간곡히 원하였다. 그래서 임시로 변화하여 한이 되고 그와 더불어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호적에 실리게 되었다.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을 낳아 교화를 베풀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치시니 무리들일 잘 따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후에 치우천황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때에 구한은 모두 삼신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을 하였다. 아울러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구한은 모조리 삼한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고 불렀다.


<밀기>에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서 걱정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를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로부터 슬그머니 토벌하여 벌할 뜻을 품었다.]


이때에 무리의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 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 무리였다. 범 무리의 성질은 잔인한 짓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 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 지는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찌기 서로 도울 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 한 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따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곰 무리의 여추장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함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찾아가 뵙고 말한다. [원컨대 한 굴에 함께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 하나를 내려주시고 신계의 무리로 받아 주옵소서]하니 한웅이 이를 허락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범 무리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로 내쫓았다. 한족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뒤에 갈고한웅이 나셔서 염제신농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한웅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한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찌기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말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신시역대기

배달한웅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신시라고 한다. 뒤에 청구국으로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1세를 한웅천황이라 하며 또 거발한이라 하니 재위 94년에 120세까지 사셨다.

2세는 거불리 한웅이니 재위 86년에 102세까지 사셨다.

3세는 우야고 한웅이니 재위 99년에 135세까지 사셨다.

4세는 모사라 한웅이니 재위 107년에 129세까지 사셨다.

5세는 태우의 한웅이니 재위 93년에 115세까지 사셨다.

6세는 다의발 한웅이니 재위 98년에 110세까지 사셨다.

8세는 안부련 한웅이니 재위 73년에 94세까지 사셨다.

10세는 갈고 한웅 또는 독로한이라 하니 재위 100년에 125세까지 사셨다.

11세는 거야발 한웅이니 재위 92년에 149세까지 사셨다.

12세는 주무신 한웅이니 재위 105년에 123세까지 사셨다.

13세는 사와라 한웅이니 재위 67년에 100세까지 사셨다.

14세는 자오지 한웅인데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셨다.

15세는 치액특 한웅이니 재위 89년에 118세까지 사셨다.

16세는 축다리 한웅이니 재위 56년에 99세까지 사셨다.

17세는 혁다세 한웅이니 재위 72년에 97세까지 사셨다.

18세는 거불단 한웅 혹은 단웅이라 하는데 재위 48년에 82세까지 사셨다.



단군세기


단군세기 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 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일까?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선비의 기세가 펼져질 수 없고 선비의 기세가 펼져지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드릴고 다스림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 무릇 올바른 역사학은 나쁜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 사람을 저울질하고 세상을 이야기하니, 이 모든 것이 세상에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 백성이 생긴 지도 오래되어 세상이 열린 이래의 여러가지 질서도 많이 변화하였다. 나라와 역사는 나란히 이어지며 사람과 다스림도 따로 나누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모두가 한 개인보다 먼저 생각해야 되고 또 소중하게 생각해야 됨이라.


아아! 다스린다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뜻에 따르는 것이고 사람은 오로지 바른 길을 생각해야 되나니, 사람의 뜻에 따른다는 것이 어찌 바른 길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겠는가?

나라에는 모습이 있고 역사에는 얼이 깃들어 있을진대, 모습이 어찌 얼을 잃고도 모습만으로 우쭐댈 수 있다고 할까? 바른 길로 바로 다스리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요, 모습과 얼을 함께 갖추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일은 먼저 나 자신을 아는데에 있음이라. 그런데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어떤 것부터 알아야 될까?

무릇 <삼신이 하나>라는 이치는 대원일에 그 뜻이 있으니 조화의 신은 내려와 나의 성품을 이루고, 가르침의 신은 내려와 나의 삶을 이루고, 다스림의 신은 내려와 나의 정신을 이룬다.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인저.


무릇 사람의 성품이라는 것은 신의 뿌리다. 그렇지만 신이 성품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해서 성품이 바로 신 그대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가 밝게 빛나며 어둡고 더럽지 않을 때에 비로소 참성품이라고 한다. 이로써 신은 기를 떠날 수 없는 것이며, 기도 또한 신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신의 성품과 기가 잘 조화되어 합쳐진 후에 스스로 성품이나 삶을 알 수 있는 것이리라.

성품은 삶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삶도 성품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스스로의 성품과 삶이 잘 어울린 뒤에야, 이 몸이 신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기운 넘치는 삶에서 비롯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품을 깨닫게 됨은 천신과 그 뿌리를 같이 함이고, 그 삶이 세상에 나는 것은 자연과 그 기운을 같이 함이며, 그 정신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모든 목숨 있는 것들과 그 업을 같이하는 것이다. 하나를 알아 셋을 품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따라서 굳은 마음이 바꾸지 않을 때 <참 나>라고 하며, 신통하여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을 때 신이라고 하나니 참된 나는 신이 머루르는 바른 곳이다. 이 참된 근원을 알고 올바르게 수련한다면 좋은 징조는 스스로 몰려오고 밝은 빛이 항상 비추리라. 바로 하늘과 사람이 잘 어울렸을 때 이로부터 세 가지 신의 성품을 배워 계율로서 맹세한다면 비로소 하나라는 것에 돌앙로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품과 정신이 잘 어울려서 빈틈이 없으면 세 가지 신이 하나인 상제와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 어울리고, 마음과 기와 몸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도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게 된다. 감, 식, 촉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한님 그대로인 셈이니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 그 덕을 베풀어서 함께 즐거우며, 하늘, 땅, 사람과 더불어 끝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라.


이런 까닭에 가르침을 세우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 스스로를 바르게 하고, 그 모습을 뒤집어 바꾸려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모습없는 것에서부터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알아나가는 단 하나의 길인저!

오호라, 슬프도다! 부여는 부여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한족이 부여에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고, 고려는 고려대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몽고가 고려에 쳐들어와서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에 부여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한인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며, 고려에 고려다움이 있었다면 몽고 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라.

아아, 슬프도다! 얼마 전에는 잠이나 청과 같은 무리들의 못된 의견들이 몰래 수많은 귀신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덮었다. 남생이나 발기 따위들과 같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 합쳐진 것이다. 바른 길도 사람다운 생각도 다 없어지고, 나라 꼴도 나라 정신도 다 사라져 버린 후에 나라를 위한다는 이들인들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만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간섭하는 정치는 갈수록 심해져서, 임금을 바꾸고 다시 앉히기도 하며 대신을 마음대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 멋대로 설쳐대고 있어도, 나와 같은 나라의 기둥되는 신하라는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앉아만 있을 뿐, 그 대책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바로 나라에 역사가 없으니 모습은 있어도 그 얼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한 벼슬아치의 힘으로는 조금도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바로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다 스스로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그 할 바를 찾을 때에 나라르 구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라를 구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것이다.

그러면 나라를 구함은 어디에 그 중요함이 있을까?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나라에는 역사가 있어야만 되고 그 모습을 가지려면 얼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라.

신시에 하늘을 여니 이로부터 나라의 계통이 이어지게 되었고, 나라의 계통이 이어짐에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으며, 백성도 다스리는 계통이 있음으로써 모여들게 되었으니 역사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기쁘게 단군님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효경대왕 12년(1363년) 계묘 10월 3일 홍행촌의 늙은이가 강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단군세기


고기에서 말한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년 5월 2일 인시에 밝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14세 되던 갑진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 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으로 삼고 대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무진년 제요도당때에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에 이르르니 온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무진원년, 바야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했다.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려 말했다. 하늘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은 아니니라. 너희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참마음을 다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 마음이 곧 한님을 보게 되리라.

하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라. 이런 까닭에 스스로를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도 살필 수 있으리라. 다른 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뜻에 잘 맞출 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 어느 곳에서도 잘 쓰일 수가 있는 것이리라.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또 나라에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충성되고 효도함이니라. 너희가 이 도를 잘 따라 몸에 지닌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화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헤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다.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 크건 작건 가림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사랑할지언정 서로 헐뜯지 말고 서로 도울지언정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나리라. 너희들, 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다만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양보하여 서로 어쩌지 않고 함께 일하여 서로 빼앗지 않는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리라. 너희들, 호랑이 무리를 보아라. 힘만 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어 버렸도다. 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잃고 난폭하게 날뛰지 않는다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라. 항상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들을 사랑할지니라. 너희는 위태로운 것을 만나면 도울지언정 모욕을 주지 말지니라. 너희가 만일 이런 뜻을 어긴다면 영원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 네 한 몸은 물론 집안까지도 다 사라지리라.

너희가 만일 논에 불을 일으켜 벼들이 다 타버리게 된다면 하늘이 이를 벌할 것이니라. 너희가 아무리 두껍게 싸서 감춘다 해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라. 너희는 항상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녀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 나쁜 것을 감추지 말 것이며, 재앙을 감추지 말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모든 백성을 가까이 하라. 너희는 이로써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나니, 너희 오가의 무리들이여, 이 뜻을 잘 따를 지어다.


이에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겐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정사 50년,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께서는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에 그 비석이 있다.

무오 51년, 임금께서 운사인 배달신에게 혈구에 삼랑성을 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이 바로 그것이다.

갑술 67년, 단군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에서 우사공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와 영주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회대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 93년, 단군께서 버들궁궐에 계셨는데 흙계단이 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단목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는 물건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으니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누리를 갇그 덮어서 멀리 탐랑에 까지 미쳤으며 가르침은 점차로 널리 퍼져 갔다.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 64족을 포함하였다. 이 해 3월 15일 단군께선 봉정에서 붕어하시니 교외로 10리 쯤 떨어진 땅에 장사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함께 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더라. 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이 되었다.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축 원년,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가 없었다. 봄 가을로 나라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 짓고 뽕나무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또 기숙사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제순유우가 유주영주의 두 주를 남국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와 도라 등을 그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노래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신인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참전의 계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마세.

어아 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되어 과녁마다 뚫고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 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임인 2년, 단제께서는 소련 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루었으니, 사흘 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석 달 동안 느슨하지 않았고, 한 해가 지났을 때까지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 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 때로부터 온통 풍속이 변하여 상을 치룸에 다만 다섯 달로 멈추던 것을,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덕으로 교화하면 백성이 이를 따름이 우편 말의 빠름과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써 알려졌으니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익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계묘 3년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 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

경술 10년 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임자 12년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 58년,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산 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하였다. 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였으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 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이 새로 즉위했다.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기해 원년 5월, 단제께서 삼랑을 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도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 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신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뜻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이가 세번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 길은 아비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 하고자 하는 이는 곧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되고자 하는 이도 역시 아들답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인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3.7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 뭉쳐서 깊고 묘한 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게 되는 것이라. 이를 커발한이라 하며 구한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같이 되었다.


경자 2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신축 3년 신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갖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에 차이가 있게 하였다.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다. 그 후손에 협야노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고 칭했다.

계미 45년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했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갑신 원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이를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후 신선 불사의 설은 삼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

무자 5년,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 배 만드는 곳을 살수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 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에게 명령하여 람, 진, 변의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 구을이 즉위하였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임술 원년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다.

계해 2년 5월 황충의 떼가 크게 일어 온통 밭과 들에 가득찼다. 단제께선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 4년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기사 16년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셔서 삼신의 단을 봉축하고 많은 한화를 심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사 곧 붕어하시니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인 달문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무인 원년

임자 35년 모든 한들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케 하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 하였다. 그 사에 가로대,

[아침 해를 먼저 받는 동녁의 땅에 삼신께서 밝히 세상에 임하셨네. 한님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니라. 뭇신들이 한웅�르 보내고자 의논하니 조서를 받으사 처음으로 개천하셨네. 치우는 청구에 우뚝 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회대 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 오더라. 이에 천하는 능히 넘볼 수 없었더라.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한을 움직이더라. 어수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는 새롭기만 하더라. 원한 있는 자 먼저 원한 풀고 병 있는 자 먼저 제거하며, 한마음으로 오직 어질고 효도함에 마음을 두시니, 사해에는 모두 남김없이 광명이 있어라. 진한은 나라 안을 진압하고 길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유신되리라. 모한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가�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 추, 저울 그릇과 같음이라. 저울 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라. 저울 추는 안덕향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이뤄 나란히 있고, 덕을 신뢰하고 신정르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왕업은 일어났다가는 망하는 법. 흥폐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니라. 정성은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

고 하였다.


마침내 뭇 한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대저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의 오훈, 신시의 오사를 가지고 끝없이 지켜나갈 일로 삼는도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이루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사람 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다스려 산업을 일으킬지니라.]

라고 하셨다.

먼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시고는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아울러 사형과 남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화를 입는 일을 없앴다.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의 결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고 다 화합하는 마음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렀으니, 바로 어진 정치의 비롯함이 여기에서 시작된 듯하였다.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 곳이었다.

계측 36년 단제께서 돌아가시니 양가인 한율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갑인 원년

정미 54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서한 즉위하다.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무신원년, 이십 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도록 하였다.

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맺혔다.

신해 4년, 단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나서서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크게 관제를 고쳤다.

갑인 7년, 세 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을묘 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술이 즉위했다.


9세 단군 아술 재위 35년

병진 원년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바를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길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 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진 자를 그냥 놔 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졌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 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 후, 새 궁궐을 구월산의 남쪽 기�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 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 버리도록 하시고는 삼 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경인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노을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신묘 원년 처음으로 큰 동물 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진 2년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을미 5년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 사는 이들까지 크게 기뻐했다.

병오 16년 동문 밖 십 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의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을축 35년 처음으로 감성을 두었다.

기축 5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

경인 원년 단제께서는 오가에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고 이름했다. 이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한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는 위에서 조술하신 바요 의관대일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시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 곳이라고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이 있게 되었씁니다]

라고 하다.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한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 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한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이라 하였다. 사흘 동안 재계하시고 이레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듯 했다.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니

모든 일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에 내려와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

이에 돌에 이 글을 새겼다.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방울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러써 위세를 보였다.

을해 46년,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가지 재주들을 관람하셨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해서 노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 오가를 돌아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술 57년,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년 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 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 아한이 즉위하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정해 원년

무자 2년 여름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사 여홍성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을묘 29년 청아의 욕살인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무인 52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흘달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흘달 (혹은 대음달) 재위 61년

기묘 원년.

갑오 16년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 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누리에 넘쳤다. 이 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홀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무술 20년,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무진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기묘 6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백성들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 지낸 후 우가인 고불이 즉위하였다.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경진 원년

을유 6년 이 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 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

[하늘이 크다 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 것이며 비는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

라고 하니, 말을 끝내자 큰 비가 수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신유 42년 9월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 8천만인이었다.

기묘 16년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 (혹은 후훌달) 재위 51년

경진 원년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사수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 및 고유를 채취하도록 했다. 강르 7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정미 28년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 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기미 40년,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경오 5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우가 위나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신미 원년

무술 28년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한인, 한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내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의 말함이다. 선인들은 한화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무진 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 재위 68년

기사 원년

갑신 52년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의 근처에 이르르니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

[오래 선인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체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 책화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할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거니.]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 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람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병자 68년,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 재위 49년

정축 원년

병신 20년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 55년

병인 원년

기축 24년 남상인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왔다.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짓다.

경신 5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홀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홀 재위 43년

신유 원년

신미 11년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 공공인 공홀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 43년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 은나라 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 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늘겅서 제위를 지키기가 어렵다 하시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맞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 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내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 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저하고 서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단제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 갔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구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 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 신지인 육우는, [아사달은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 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을묘 20년 이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들이 이에 따랐다.

계미 4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홀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홀 재위 76년

갑신 원년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령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펴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 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를 못하였다.

무자 5년 이한 및 오가를 불러서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은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경자 원년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다.

신축 2년 여러 한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경술 11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

신해 원년

전해 37년 기자 서화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정유 47년 단제께서 상소도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영신과 직신의 구분을 물으시다. 이에 삼랑 홍운성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이옵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이오며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입니다. 근원이 이미 흐렸으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이 될 수 없는 일이나니, 때문에 임금이 성인이 된 후라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되 [옳은 말인지고]라 하다.

기유 59년 밭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

무인 8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 재위 65년

기묘 원년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

계미 65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두밀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

갑신 원년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 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 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기유 26년 단제 붕어하시니 해모가 즉위하였다.


28세 단군 해모 재위 26년

경술 원년 단제 앓으시니 백의동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시다.

경신 11년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일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 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년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정축 28년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

무인 원년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신해 3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작 내휴가 즉위하였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 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라모가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 재위 25년

정해 원년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신해 25년 단제 붕어하시고 아들 추밀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임자 원년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병인 15년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 4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이 즉위하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임오 원년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무자 7년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셨다. 맹세하여 올린 글이 있으니,

[삼성의 존귀하심은 신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시오며 삼신의 덕은 성인에 의해 더욱 크시어라. 빈 것과 큰 것은 한몸이라 하겠고, 하나는 또 모두와 한가지로 같음이라.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힌다면 참된 가르침은 이에 서고 믿음이 오래 갈 것은 보이는 이치라. 그 기세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 본다면 저 백악은 어딜가나 끝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

라고 하였다.

을사 2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오루문 즉위하다.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

병오 원년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비추고

나라엔 어진 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나라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을묘 10년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 2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이 즉위하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기사 원년

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 24년 큰 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서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을 보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

갑술 66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병자 6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이 즉위했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정축 원년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

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갑술 5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했다.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을해 원년

경오 56년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이 즉위하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 45년

신미 원년

을묘 4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 즉위하다.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

병진 원년

신묘 3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 즉위하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임진 원년

기유 1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 즉위하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경술 원년

기사 2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 즉위하다.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경오 원년

기묘 1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 즉위하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 원년

을묘 36년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받들어 모시고는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이 해에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 3월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께서는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 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 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의 이름은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을 삼조선이라고 바꿔 불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 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을 개축하도록 하여 평양이라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을 짓도록 하였다.


정사 2년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의 제사를 지냈다.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오 경배하시니 첫번째 절에 세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번째 절에 여섯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번째 절에 아홉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라고 한다.

임신 17년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 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인사를 올렸다.

갑신 2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가 즉위하였다.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을유 원년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

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 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언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공격하여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정사 33년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신미 47년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

무인 54년 상곡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기뵤 55년 여름 크게 가물다. 죄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이 즉위하다.


46세 단군 보올 재위 46년

경진 원년 12월 번조선 왕 해인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가 다투어 일어났다.

무술 19년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정사 38년 도성에 큰 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니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하였다.

계해 44년 북막의 추장 이사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서울로 돌아오셔서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으매, 고열가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지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병인 원년

기묘 14년 단군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기유 44년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 왔다.

계축 48년 시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이해 겨울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 57년 4월 8일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었다.


계해 5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하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대

[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들 오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고 하시고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이튿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금상폐하의 천조 후 12년 계묘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이해 10월 3일 홍행촌의 늙은이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북부여기


북부여기 상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 워년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 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계해 2년 이 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러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기사 8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임신 11년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질하고 돌아갔다.

경진 19년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신사 20년 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이라 하다.


계미 22년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진나라 왕정을 박랑사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내다.

임신 31년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도케 하였다.

기해 38년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다.

병오 4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선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에 장사지내니 태자인 모수리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35년

정미 원년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의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기유 3년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신미 2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임신 원년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섬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의 겨울이었다.

계축 42년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 49년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했다.


4세 단군 고우루 (혹은 해우루) 재위 34년

신유 원년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계해 3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갑자 4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정묘 7년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에 두어 이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계유 13년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직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은 고두막한에게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라고 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며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북부여기 하

5세 단군 고두막 (혹은 두막루) 재위 22년, 제재위 27년

계유 원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갑오 22년 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을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3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해서 태어났다.

신유 49년 제가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지냈다. 태자 고무서 등극하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 원년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써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고 불렸다. 이 때에 한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계해 2년 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에 나이가 23세였다. 이때에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 마라, 협보 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으므로 뒤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에 물고기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가섭원 부여기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을미 원년 왕은 북부여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분능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표범,곰,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 3년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능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임인 8년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을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갑진 10년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르자 큰 돌을 마주 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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