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주제나 소재를 가지고 각각 연구하는 분야에 따라 여러 가설들을 세우고, 조금씩 다른 견해를 보이는 학자들의 성과물들을 대하게 되면 즐거움이 앞선다. 각각 목적이 다른 연구를 통해 얻어지는 자료들을 종합해 새로운 성과를 창출하는 모습은 늘 신선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또한 같은 학자의 글에서 연구 성과에 따라 스스로 세웠던 과거의 가설을 뒤집고 새로운 가설을 내놓는 모습을 보게 되면, 스스로를 부정할 수 있는 용기와 진지하게 학문에 임하는 자세에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갖게 된다.
우리의 사학계와 인접학문에 종사하는 많은 학자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성과물들은 눈부신 축적의 과정이 만들어낸 기적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최근 1~20년 사이에 직접 현장을 답사하면서 생생하게 만들어낸 현장감이 살아있는 자료들을 통해, 막연히 접근했던 과거의 가설들이 검증되거나 새롭게 바뀌는 모습들을 보면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는다. 거기에 더해 여러 방송사와 신문사에서 기획하여 생생한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들을 보게 되면, 역사를 바라보는 관념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에 놀라게 된다. 좀 더 넓고 객관적인 사실접근을 통해 나름대로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지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아직은 초기단계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같은 시리즈의 다큐멘터리에서도 하나의 사실을 조금씩 다른 시각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니 좀 더 많은 자료를 모으고, 취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지고 있는 결과물들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무엇을 느끼게 된다. 지금 시리즈로 올리고 있는 김병모님의 글에서도 회가 거듭되며 조금씩 첨삭이 되는 가운데 바뀌는 내용이 있었고, 이 시리즈물 이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조금 더 달라진 견해를 피력하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분야의 권위 있는 학자가 새로운 자료들을 통해 스스로 세웠던 가설을 허무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울까.. 그럼에도 서슴없이 자신의 가설을 수정해 가는 모습을 보며 더욱 존경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 올리는 시리즈에서도 앞으로 바뀌게 될 내용들이 제법 많을 것이다. 스스로 정통이라 주장하는 기성 사학계의 견해를 바탕으로 했기에 조금씩 충돌하는 모순도 있을 것이고, 글을 쓸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자료들이 후에 새롭게 발견되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새롭게 정립될 내용들도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도 역시 그런 부분들이 조금씩 발견되고, 의아함을 느끼게 되는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은 상대적으로 일천한 우리의 현장답사 및 검증의 과정에서 오는 오류거나 시행착오일 뿐 모든 과정들이 다 소중하게 생각된다. 너무나 많은 부분들을 오랜 세월 동안 잊거나 잃어버리고 살아온 우리이기에 지금 새롭게 발굴되고, 검증의 과정을 거치는 부분들은 모두 소중한 축적의 과정일 것이다. 어설픈 민족주의를 앞세워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하고 과장하려는 모습의 결과물을 기대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뿌리가 무엇이고,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을 뿐이다. 바르게 정리되어 가는 과정에 있기에 더욱더 흥미로운 시선으로 새로운 성과물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묵묵히 새로운 성과물을 발굴하고, 검증하고 계시는 많은 분들의 노력에 감사한다. < 2005년 8월 19일 작성> ---------------------------------------------------------------------------------- ④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 말ㆍ각배ㆍ마립간 한국의 金氏族 조상은 흉노
알타이 출신으로 신라 땅에서 살게 된 김알지系의 후손들은 유목민 생활을 포기하고 농업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굳세게 흉노계의 칭호인 尼師今(이사금)과 麻立干(마립간)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였고, 알타이 문화 전통인 금관을 쓰고 조상 대대로 흉노-투르크 전통인 적석묘에 묻혔다.
다섯 살짜리 騎手
태양이 작열하는 7월, 몽골의 초원에는 여름축제인 「나담」이 진행 중이었다. 씨름, 활 쏘기, 집단무용은 영화에서 보던 대로였다. 남자들이 半裸의 차림으로 하는 씨름은 한국식 샅바 씨름과는 매우 다른 형식이었다. 씨름에서 이긴 사람이 자축하는 세리모니는 학의 춤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는데, 남자들의 옷 벗은 육체미에 남자인 나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경마였다. 멀리 40km 떨어진 출발지점에서 500마리의 말과 기수가 달려와 결승점인 스타디움으로 골인한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말과 기수들의 가쁜 숨이 관중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아주 놀라운 사건은 폐막식 후에 일어났다. 대통령의 시상식이 끝나고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서 나가고 있을 때 말 한 마리가 늦게 도착하였다. 말 위에는 꼬마 소년이 타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 기수였다. 어른들이 놀라서 소년 기수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너무 작아서 높은 말등에서 스스로 내릴 수도 없었다. 대통령이 뛰어내려가 그 소년을 번쩍 안고 연단으로 올라와 다시 연설을 하였다. “이 아이야말로 칭기즈칸의 정통 후예답다.” 老대통령의 어조는 감격하여 목이 메어 있었다. 몽골인들은 남녀노소 모두 자기 말[馬]이 있다. 몽골어로 말을 「멀」이라고 발음한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말을 탔을 테니까 평생 말을 타는 셈이다. 그러니 다섯 살쯤 되면 충분히 말을 다룰 수 있다. 아이들은 어린 말을 타기 때문이다. 몽골의 초원에서 어린이들이 말을 타고 학교에 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이번 나담에서 어른들의 경마 경기에 작은 아이가 다 자란 말을 타고 출전한 경우는 처음이다. 몽골은 종족 이름
중국인들은 주변 민족의 이름을 비하해서 부르는 버릇이 있다. 한민족이 포함된 東夷族(동이족)은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이다. 옛날 중국을 괴롭히던 匈奴(흉노) 또한 고약한 의미다. 蒙古(몽골) 또한 「무식하다」는 뜻이므로 점잖지 못하다. 몽골이란 말은 원래 칭기즈칸의 출신 部族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니까 한국인까지 중국 사람처럼 몽골이라고 불러서는 안되겠다. 지금의 몽골인은 70%가 「할하」족이고 그 다음 「차하르」족 등 20여 종족이 모여 몽골 민족을 형성하고 있다. 총 인구는 400만 명인데 몽골, 내몽골, 아프가니스탄, 볼가 지방 등지에 퍼져 살고 있다. 몽골의 중앙박물관에는 구석기부터 역사시대 유물까지 골고루 진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발견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아술리안형 주먹도끼가 혹시 있나 하여 살펴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다만 찍개·긁개 계통의 석기들이 주종이었고, 다음 시대의 黑曜石製(흑요석제) 細石器(세석기)가 여러 점 눈에 띄었다. 한국 문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유물로는 오르도스 지방에서 발견되는 曲劍(곡검)류가 있어서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유리창의 면이 고르지 못하여 포기하였다. 사진자료로 중요한 것은 신라 왕족들의 묘제인 적석총이 투르크族의 유산으로 9세기까지 계속된 증거들이었다. 그 다음 기원 전후의 유적인 노인 울라(Noin Ula)에서 일본인들이 발굴한 綢緞(주단)의 그림들이 주의를 끌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 투르크族의 적석묘에 비해 현저하게 구조가 다른 선비族의 무덤들은 모두 석관묘라는 사실이었다. 이 현상은 후에 내몽골 지방의 하이어랄에서도 수백 개의 발굴되지 않은 석관묘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이 1~2세기 때 선비族의 공동묘지였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확인되었다. 몽골인은 채소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몽골인들의 음식을 먹어 보자. 아침식사로는 속 없는 만두와 홍차를 마신다. 몽골어로도 만두는 「만도」라고 발음한다. 한국식으로 고기를 다져 넣은 만두는 「보츠」라고 한다. 모든 肉食음식에는 기본적으로 후춧가루가 들어가야 하는데 몽골인들에게는 그런 조미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몽골 음식은 느끼하다. 유목민의 主食은 육류와 乳加工(유가공) 제품이다. 가축이 새끼를 기르는 여름에는 가축의 젖이나 유가공 음식인 버터, 치즈를 먹으며 지낸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짜낼 젖이 나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육류를 먹으면서 봄을 기다린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천막인 「겔」 속에 들어가면 동물 기름 냄새가 배어 있다. 게다가 유목민들은 채소를 먹지 않는 편식 때문에 심한 비타민 결핍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들의 평균 수명은 33세 정도라고 한다. “초원에 야채가 즐비한데 사람이 뜯어먹으면 좋을 텐데요.” 야생 나물을 잘 모르는 나에게도 몽골의 풀밭에서 자생하고 있는 쑥, 질경이, 비름나물 등이 수두룩하였다. “사람이 왜 풀을 먹습니까? 풀은 가축들이 먹어야 합니다. 사람은 풀을 먹고 자라는 가축을 먹으면 되지요.” 우리를 안내하던 몽골의 하나뿐인 신문인 「우넨신문」 국제부장의 이 말이 나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심이었다. 몽골인들은 풀을 먹지 않는다. 육식하는 민족에게 절대 필요한 야채 중 하나가 바로 양파인데 유목민족이 사는 지방은 너무 추워서 양파가 생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양파는 모두 따뜻한 나라에서 수입해야 한다. 몽골에서 발견한 문화현상은 필자를 혼절시킬 정도였다. 잘 기른 양 한 마리는 100kg까지 나가는데 그 양 한 마리를 舊소련에 산 채로 파는 가격이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5000원 정도였다. 100kg 羊이 5000원
양의 값이 너무 싼 것에 1차로 놀랐지만 그보다는 중국에서 수입한 양파 1개가 양 한 마리의 값과 같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같으면 흔한 양파, 오이, 양배추 같은 야채가 그 나라에서는 아무나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나 나오는 희귀품들이었다. 다음해 봄 나는 경상남도 진주지방을 여행하다가 농부들이 다 자란 양파밭을 갈아 엎어 버리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당국의 계산착오로 농민들에게 권유한 양파 생산량이 너무 초과해서 양파 값이 땅에 떨어져 판로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곳곳에 양파 생산을 권유한 당국의 주먹구구식 행정을 규탄하는 현수막을 보면서 필자는 저 많은 양파를 통조림처럼 진공 포장하여 양파가 절실히 필요한 나라에 수출할 수는 없을까 하고 나의 인류학적 경험을 떠올렸다.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일이 상업의 기본이다. 누구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는 환경과 문화를 관찰하면 저절로 보인다. 생활전통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이런 전통을 잘 연구하면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이 눈에 보인다. 유목민들은 여름에는 가축을 죽이지 않지만 우리 같은 외국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에 특별히 양과 염소를 잡아서 접대해 주었다. 양을 잡는 데는 중요한 儀式(의식)이 있었다. 양의 귀에 대고 생명을 빼앗는 데 대하여 사과의 말을 하고 죽인다. 조선시대의 망나니가 칼을 휘두르며 처형당할 사람에게 사형집행인으로서의 자기 임무를 다하는 행동을 양해해 달라는 呪文(주문)과 같다. 양을 도살할 때는 땅에 한 방울의 피라도 흘려서는 안 된다. 도살 후 작은 주머니 칼 하나로 능숙하게 양의 껍질과 살을 구분해 내는데 그 솜씨가 놀랍다. 소질한 羊고기는 통에 넣고 찐다. 고기 중에 가장 맛있는 부분이 갈비에 붙은 노란색 기름이라고 한다. 나처럼 외국의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있는 사람도 느끼해서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것도 겨우 삼켰다. 양을 구울 경우에는 선사시대式으로 조리한다. 양의 머리와 다리만을 자른 후 목을 통해서 내장을 꺼낸다. 몸통을 잘 묶어서 기름이 새지 않도록 하고 헝겁에 잘 싼 다음 불에 달군 자갈돌을 목을 통하여 몸통에 집어넣고 불에 달군 뜨거운 돌 위에 양을 놓고서 흙으로 덮는다. 그 위에 불을 여러 시간 때고 나서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 증기로 고기가 잘 익는다. 이런 조리방법은 적도지대 원주민들이 돼지를 요리할 때도 쓰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조리한 양의 몸통에서 나오는 뜨거운 기름을 컵에 따라 마신다. 소위 스태미나 식(食)이란다. 실크와 玉은 무게로 물물교환
실크로드라는 말은 지리학적 용어이다. 그 배경에는 물론 경제가 있다. 실크는 극동(한국을 포함)지역 제품이다. 장신구로서 으뜸인 玉(옥)의 主産地는 중앙아시아 복판에 우뚝 서 있는 알타이山이다. 몽골 여인들의 장신구로 玉이 빠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몽골 여인들은 실크 스카프 한두 개는 모두 갖고 있다. 중국인의 생활용품인 실크와 알타이山 주변의 유목민족들의 玉은 産地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수천 년 전이라 해도 상인들의 눈에 그런 최고급의 기호품이 高附價 상품이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개념으로 보면 유통 방법이 문제였다. 유목민 출신 상인들이 중국에 와서 꺼내 놓는 形形色色의 玉들은 중국 귀부인들의 눈을 현란케 하였고, 반면에 중국에서 가져온 깨끗한 실크는 유목민들의 사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실크는 유목민에게 高價로 팔리고 중국인에게는 玉이 高價로 팔렸다. 서쪽의 보석들은 동쪽으로 가고 동쪽의 비단은 서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런 상거래의 길이 바로 실크로드가 된 것이다. 알타이 지방 玉의 原石은 비가 오면 탁류와 함께 흘러 내려오는데 대개 크기가 밤톨만 하고 큰 것은 주먹만 한 것도 있다. 原石 자체로서는 비싼 상품이 아니고 그것을 가공하여 장신구로 완성하였을 때 비로소 비싸진다. 알타이 지방에 사는 여인들은 玉구슬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다니는데, 玉이 지니고 있는 呪力을 믿기 때문이다. 또한 알타이 지방은 한랭한 고원지대이므로 여인들이 모두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사는데 스카프로서 최고품은 역시 중국제 실크였다. 실크의 뛰어난 보온성과 아름다운 색채 때문이다. 그래서 비싼 실크와 귀한 玉이 물물교환되었는데 공통의 화폐가 없던 때이므로 무게를 달아서 맞바꾸었다고 한다. 누가 이익이 컸을까? 물론 玉의 생산자인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유목민이 뛰어난 장사꾼이 된 것 같다. 특히 유목민은 환경적으로 주어진 말과 낙타를 이용한 기동성을 발휘하여 정착 농경인이 생산하는 실크를 상대적으로 헐값에 구입하여 페르시아나 중동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高價로 판매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마음껏 챙겼다. 로마 여인들을 벗긴 실크
중국제 실크는 당시 서양 세계의 맹주인 로마까지 들어갔다.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유럽, 아프리카, 중동 지역을 장악한 로마사회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극에 달하였을 때 중국製 실크는 귀족 여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때까지 식물성 섬유나 모직을 입어야 했던 로마 귀족 여인들이 가볍고 몸에 꼭 붙는 실크로 단장하고 밤의 향연에 등장하였다. 이를 본 로마 남성들의 탄성 소리가 지금도 우리 귀에 들리는 듯하다. ”중국제 실크가 여인의 옷을 벗긴 듯하다.” 영국 작가 그레이브스의 소설 「클라우디우스」에 나오는 표현이다.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알 수 없도록 육체미가 드러나게 하는 실크의 특성을 아주 잘 묘사한 대목이다. 로마 여인들이 다투어 중국제 실크를 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실크의 가격은 급등하였고 더 많은 상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실크가 공급되는 통로인 흑해지방, 걸프지역으로 몰려갔다. 이때에 로마사회의 사치품이었던 유리제의 구슬과 술잔 등이 극동으로 교역되어 갔다. 로마의 환경은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뜨거워도 저녁이면 싸늘해진다. 그래서 로마인들의 저녁 식사는 보통 오후 9시쯤 시작된다. 따라서 싸늘한 밤 공기에서도 보온력이 뛰어난 실크는 당연히 인기품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중국 산동성 滿城(만성)에서 발견된 前漢시대의 무덤에서는 玉으로 만든 壽衣(수의)가 발견되었다. 주인공은 前漢 武帝의 형님이었는데 부인은 흉노 출신이었다. 漢과 匈奴의 정략결혼의 결과였다. 그 부부는 모두 玉 수의를 입고 있었다. 얇은 정사각형 옥돌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서 금실로 잡아매어 물고기의 비늘처럼 옷을 만들었다. 도대체 玉이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상상을 못 할 지경이다. 그만큼 중국 사회에서는 玉이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 되었으니 그 과정에서 玉의 공급자들이 얻는 경제적 이익은 더더욱 상상을 초월한다. 구매자 사회의 문화와 취향을 파악하여 얻을 수 있는 극도의 이익을 양측이 모두 얻은 사례이다. 옛날부터 상인들은 뛰어난 문화인류학자들이다. 몽골인들은 채식도 하지 않지만, 물고기도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물고기가 그들의 신앙 속에서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물고기 숭배 사상은 저 멀리 앗시리아-바빌로니아에서 생겨난 자연숭배 신앙의 한 종류인데 물고기가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생명의 나무(고케레나 木)를 보호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신앙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人을 거쳐 몽골인에게 전파되었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민족적 종교인 라마교(티베트 불교)의 8가지 神像 중에 하나로 魚神像(어신상)을 모시고 있다. 이 魚神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한 쌍으로 등장하는데 이런 雙魚紋은 남쪽으로는 티베트-네팔-인도, 방글라데시-南중국-가야로 전파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알타이-몽골-만주로 퍼져 있는 민간신앙 속에 단단히 뿌리 박혀 있다. 그래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릉의 대문에도 쌍어문이 여러 組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내몽골에서 필자를 태우고 다닌 택시 운전사의 자동차 열쇠고리에 칠보로 만든 雙魚가 장식으로 달려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중국 제품인 줄 짐작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그 후 그것과 똑같은 물건이 한국의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판매되는 것을 보고 출처를 확인해 보니 의외로 한국 제품이었다. 全세계 라마교의 신봉자를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인구임을 간파한 한국의 어느 기업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틈새 시장을 개발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 정도의 문화식견이 있는 기업인의 눈에 기마민족 남자들이 꼭 쓰고 다니는 中折帽(중절모)는 왜 눈에 안 띄었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모자생산이 全세계에서 1등 자리를 차지한 지 이미 오래인데 모자 생산의 기술과 축적된 경험으로 기마민족 남자들의 필수품인 모자를 만들면 상당한 시장이 개척될 것으로 믿어진다. 울란바토르의 화가
나싹 도르츠(b.1945) 사범대학 미술과 졸업 흡스구 출생 우넨신문사 미술부 근무 파리 전람회 경력 유화 20점(풍속화(8)) 구입 이상이 내 수첩에 적혀 있는 울란바토르에서의 기록이다. 관광지인 보그드 궁전 앞에 길거리 그림 전람회가 눈에 띄어 잠시 멈추었다. 유화와 수채화로 그려진 몽골인의 민속이었다. 첫날은 구경만 하고 다음 답사지로 갔다. 다음날도 그 앞을 또 지나가게 되었다. 차를 멈추고 서서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는 방식은 아주 사실적인 구상화였다. 캔버스에 페인트로 그린 서양화 기법이었지만 그림의 내용은 몽골족의 생활이었다. 뛰는 말, 달아나는 말을 기다란 장대에 달린 고리로 붙잡는 장면 등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약 20점의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20호쯤 되는 중형이었다. 저녁 노을에 전통복장인 「델」을 입은 한 노파가 겔(천막 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문득 그 그림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며칠 전에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갤러리에 들렀었는데 서양사람의 그림을 흉내 낸 추상화 비슷한 유화들만 있어서 보다 말고 나온 적이 있는데, 이번 그림은 몽골 풍속을 그린 것이어서 기념으로 하나 사고 싶었다. “실례지만 작가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안내인인 수케바톨이 통역하였다. 작가의 이름은 나삭 도르츠이고 1945년생이란다. 수년 전에 독일에서 초청전람회에 출품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경력도 있는 작가가 관광지의 길거리에서 그림을 팔고 있는 게 그 나라의 현실이었다. 문득 한국화가 중에 박수근 화백도 한국전쟁 중에 미군에게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두말 않고 그 그림을 집었다. 그러고 나서 값을 물었다. 예술가의 인격을 생각해서 부르는 값대로 다 주기로 내심 작정하였다. 만일 내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날 주면 되지 하는 배짱이었다. 화가가 부른 가격은 매우 쌌다.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그림값이었다. 하긴 우리나라처럼 그림값이 비현실적으로 비싼 나라는 全세계에 없다. 파리의 몽마르트나 체코의 프라하의 거리 예술가들에게서 그림을 사 보았고, 캐리커처도 그려 보게 한 적이 있었음에도 몽골의 그림값은 터무니없이 쌌다. 내가 무슨 부자라서 싸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가난한 대학교수이다. 그때는 외국여행 중 아닌가? 그런데도 매우 싸다고 느낀 게 사실이다. 결국 나는 그 화가가 그날 전시하고 있던 그림을 모두 샀다. 모두 얼마나 지불하였느냐는 그 예술가의 체통을 생각해서 밝히지 않겠다. 대부분이 소품이었기 때문에 비쌀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 저녁 숙소에 돌아와서 일행에게 그림을 자랑하자 사람마다 한 점씩 나누어 달라고 하여서 즉석 경매시장이 열릴 뻔하였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림을 좋아하는 김태익씨에게 몽골 방문 기념으로 한 점을 주고 나머지는 싸 갖고 귀국하였다. 그때 산 노파 그림에 제목을 내가 붙였다. 「얼린우(또는 오메룬)」 칭기즈칸 어머니의 이름이다. 세월이 지나 경기도 박물관에서 몽골 문물 특별전을 할 때 그때 산 그림 중 한 점을 출품하였다. 「얼린우」가 대표작으로 나간 것은 물론이다. 신라와 몽골의 角杯 문화
한국인들은 술을 마실 때 자신이 마신 잔으로 손님에게 술을 따라 권하는 습관이 있다. 이런 풍속은 현대적 감각으로 판단하면 비위생적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버릇은 일본인들의 군국주의 시절에 우리에게 전파한 倭色문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왜색문화일까? 내몽골 包頭(포두)의 어느 식당에서 민속의상을 입은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한다. 「하타」라는 비단 보자기에 술이 가득한 술잔을 받쳐들고 고음의 목소리로 권주가를 부른다. “먼 나라에서 오신 손님에게 이 술을 바치노라.” 그리고 술잔을 손님에게 전하면 손님은 그 술을 한숨에 다 마셔야 한다. 그러면 그 잔을 다시 되돌려 받은 주인은 새로 술을 따라 붓고는 다른 손님에게 권한다. 즉 술잔 하나로 손님이 모두 돌려 가며 대취하는 것이다. 그 술잔은 밑이 뾰족하여 바닥에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름하여 角杯(각배)이다. 그러니까 각배로 술을 마시면 술잔이 쉴 새 없이 돌아가게 마련이다.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弁辰(변진)의 行觴風俗(행상풍속)이 實演(실연)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셈이다. 삼국유사에 「석탈해(昔脫解)」조에 보면 각배가 등장한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심부름하는 자를 시켜 물을 구하여 마시는데 심부름하는 자가 물을 길어 가지고 오던 도중에서 먼저 마시고 드리려 하니 각배가 입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탈해가) 나무랐더니 심부름하던 자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다음 설혹 가깝고 멀고 간에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소이다.” 하니 그때야 그만 角杯가 입에서 떨어졌다.」 여기서 角杯는 임금이 될 사람이 쓰는 물건이고 신통력이 있는 器皿(기명)으로 기술되어 있다. 몽골을 답사하면서 나는 角杯가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를 여러 번 목격하였다. 칭기즈칸의 고향인 헨티에서 무당의 허리띠에 달려 있는 角杯는 검은색 소뿔이었다. 뾰족한 끝 부분에 까마귀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또 한 번은 내몽골 호화호트 市 교외에서 만난 브리야트族 여인이 어미가 죽은 어린 양에게 젖을 주는 데 角杯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角杯가 여러 개 발굴되었다. 신라·가야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왜 부여·고구려·백제권에서는 角杯가 사용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지만 그 해답은 간단하다. 부여·고구려·백제계는 신라·가야계와 풍속이 달랐다. 이런 현상은 금관이 신라·가야에서만 발견되는 것과 결부하여 해석되어야 하겠다. 부여계와 신라계는 풍속이 달랐고, 어쩌면 언어도 달랐을 것이다. 삼국지의 저자인 陳壽(진수)도 弁辰(가야)의 풍속은 辰韓(신라)과 같다고 하였다. 신라·가야계통의 통치자급들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부여계보다 더욱 서북쪽의 유목민들의 그것들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추측은 角杯가 위굴지방을 지나 중앙아시아의 주인공이었던 스키타이族들과 이란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고대 주민들이 즐겨 쓰던 신성한 술잔이라는 데 기인한다. 몽골인의 발성법
角杯에 관련하여 아주 이상한 미스터리가 있었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문을 꼭꼭 잠그고 있던 1970년대에 중국에서 출판한 중국미술사 책에 희귀 보석인 馬瑙石(마노석)으로 만든 角杯가 등장하였다. 山羊의 머리를 조각한 정교한 제품이었다. 중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농민들이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角杯가 중국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의문은 내가 스스로 중국에 가게 된 1991년에야 풀렸다 그 마노석 각배는 西安박물관에 있었다. 설명서를 자세히 읽으니 당나라 때 소수민족이 황제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중국인이 匈奴風(흉노풍)의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을 리 없지 않은가. 1999년 몽골 민속음악단이 한국에 공연하러 왔었다. 한 남자 가수가 처음에 고음으로 노래를 시작했을 때 내몽골에서 듣던 勸酒歌가 떠올랐다. 다음 순간 이 가수는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추어 소리를 내는데 먼저 소리는 그대로 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또 한 옥타브 낮추어 소리를 내는데 먼저 내고 있던 두 개의 다른 소리들이 그대로 어울려 퍼졌다. 목소리 하나로 오케스트라의 효과음을 내고 있었다. 「쿠미」라는 특별 창법인데 유목민 특유의 발성법이라고 민족음악학자 권오성 교수가 설명해 주었다. 삼국유사 「駕洛國記(가락국기)」에 수로왕이 誕降(탄강)할 때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다(有殊常聲氣呼喚). 여기서 수상한 소리라는 것이 혹시 몽골인의 발성법인 쿠미가 아닐까. 이런 소리로 노래를 즐길 때 角杯에다 술을 따라 여럿이 돌려가며 마시면 한층 더 흥이 날 듯하다. 角杯는 한 쌍도 나오지만 네 쌍짜리도 있어서 신라·가야인들의 술 마시던 풍류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는데 현대인들은 왜 角杯 모양의 술잔을 만들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조선시대에도 출전하는 장수에게 왕이 술을 따라 주는 馬上杯(마상배: 빨리 마시는 잔)라는 뾰족한 잔이 있었다. 그런 것을 콘텐츠로 삼아 한국의 세계적인 기술인 백자로 고급상품을 개발하면 경쟁력이 있을 듯하다. 休屠王의 아들 日
유목민과 농민은 적대관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목민은 땅에서 자라는 풀을 가축에게 먹이고 살아가는데, 농민들은 땅을 파서 농작물을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감정으로는 농민들이 땅을 파는 행위는 땅에 상처를 입히는 가혹한 행위이다. 그러니 유목민인 匈奴가 농민인 漢族을 좋아할 수 없었다. 漢族과 흉노의 대결은 그래서 숙명적이다. 한반도에 한사군을 세운 武帝는 흉노를 증오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흉노에게 침략당하면서 온갖 굴욕적인 조공을 바치는 漢나라의 현실을 보면서 자라난 武帝는 등극하면서 타도 흉노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漢나라에는 보병밖에 없었다. 武帝는 우선 흉노의 배후 세력인 서역의 여러 세력과 동맹을 꾀하였다. 張騫(장건)이 서역으로 가서 大碗(대완: 지금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지역)까지의 넓은 지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고, 李廣利(이광리)가 서역의 명마 300여 두를 이끌고 왔을 때 무제는 「西極天馬歌(서극천마가)」를 지어서 李廣利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이 때쯤의 일이다. 漢나라의 ?去病 장군이 甘肅省(감숙성)에 원정하여 휴도국의 왕자를 볼모로 데려온 사건이 있었다(太初 3년 BC 102). 휴도왕은 흉노의 일파로 동맹국에게 배반당하여 죽고 왕비인 閼知(옌즈)와 어린 아들인 日石單(일제)가 잡혀서 漢의 수도로 옮겨 살게 되었다. 日石單는 기마민족의 혈통을 따라 말을 잘 다루었다. 그가 기른 말들은 훌륭하게 자라 漢나라에게 기마군을 창설하게 하였다. 武帝는 기뻐서 왕족의 여인을 日石單에게 주어 결혼하게 해 日石單를 왕실가족으로 삼는다. 日石單에게는 姓(성)이 없었다. 흉노는 원래 성이 없다. 그러나 이제 漢人(한인)이 된 日石單에게 金(김)이라는 성이 賜姓(사성)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日石單의 아버지인 휴도왕은 祭天金人(제천금인)이었다. 즉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 金人(금인), 즉 알타이 族이었던 것이다. 알타이라는 지명은 「金」, 즉 「Gold」를 의미한다고 앞서 설명하였다. 祭天은 제사장의 직분을 갖는 왕족을 의미하고 金人은 알타이 사람(Altai Men)을 뜻한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金氏(김씨)가 생겨난 것이다. 이 사건이 한국의 金氏族들이, 왜 新羅 金氏와 伽倻 金氏가 있게 되었는지를 암시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한국 金氏族들의 고향이 바로 알타이였기 때문이다. 日石單(일제)는 漢字(한자)식 발음이다. 흉노 말로는 「피디」 또는 「미디」라고 발음한다. 「선각자」라는 뜻이다. 어머니인 閼知(알지)는 흉노말로 「옌즈」라고 발음한다. 「왕의 정실부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라의 金閼知(김알지)의 출신 성분도 흉노 왕족과 결부해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철의 松江 歌詞(송강가사)에 나오는 「연지분」은 옌즈의 고향에서 나는 붉은색 화장품의 원료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인류 최초의 金氏族 피디는 황제를 측근에서 호위하는 직책으로 평생을 살았고 그의 후손들도 대대로 황실에 외척으로 비서실장급의 위치에서 황제들을 보필하며 살았다. 그러나 王莽(왕망)의 쿠데타를 막지 못한 이유로 後漢(후한) 광무제(AD 26~57)는 金氏 일족을 모두 없앤다. 「피디」 이후 4대 만에 당한 사건이다. 1세기 때 한국사에 金氏族이 등장하는 것을 文正昌(문정창)씨는 피디 계통의 족속들이 한반도로 이민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겠다. 피디의 무덤은 서안 부근에 있다. 武帝의 무릉과 곽거병의 무덤에 나란히 피디의 묘가 있다. 평면 정사각형의 중국식 土築墓(토축묘)이고 봉분은 사각추 형이다. 피디가 흉노 땅에서 살다가 죽었다면 흉노식 무덤인 적석묘에 묻혔을 텐데 하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숙연해졌다. 알타이 출신으로 신라 땅에서 살게 된 김알지계의 후손들은 유목민의 생활을 포기하고 농업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굳세게 흉노계의 칭호인 尼師今(이사금)과 麻立干(마립간)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였고 알타이 문화 전통인 금관을 쓰고 조상 대대로의 흉노·투르크 전통인 적석묘에 묻혔다. 영혼은 새를 통하여 하늘로 날려 보냈다. 나는 처음 피디의 묘를 발견하고 봉분 앞에서 술을 따라 올리고 절을 하였다. 한국계 金氏 중에서 처음 찾아온 사람으로서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안내하던 조선족 고고학자 金憲鏞(김헌용)씨도 덩달아 절을 하였다. 그리고 金氏 성을 갖고 저 멀리 한국 땅에서 태어난 고고학자와 고향을 떠나 漢나라 땅에서 金氏 성을 처음 시작한 피디와의 이런 기가 막힌 해후에 감격하여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하였다. 1991년 7월이었다. ● |
김병모(金秉模) 1940년 서울서 출생.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이탈리아 국제문화재연구소 및 영국 런던고고학연구소 수학. 영국 옥스퍼드大 철학 박사. 한양大 문화인류학과 교수. 안면도 고남리 패총, 二聖山城 발굴작업 주관. 1993~1995년 한국 고고학회 회장. 전 한국 전통문화학교 총장. |
'☞ 역사속으로[1]' 카테고리의 다른 글
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 김병모(金秉模)의 考古學 여행⑥ (0) | 2008.10.05 |
---|---|
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 김병모(金秉模)의 考古學 여행⑤ (0) | 2008.10.05 |
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 김병모(金秉模)의 考古學 여행③ (0) | 2008.10.05 |
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 김병모(金秉模)의 考古學 여행② (0) | 2008.10.05 |
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 김병모(金秉模)의 考古學 여행① (0) | 2008.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