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여자가 말하는 내숭의 법칙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 할 줄 알아도 못하는 척 하고픈 때가 있다구!!”

    낮 동안 기승을 부리던 초여름 더위가 밤이 되자 거리에 고양이처럼 납작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밤바람이 민소매의 팔뚝 위로 기분좋게 살랑였고 4차선 도로를 마주하고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점 야외 테라스는

    야금야금 어둠을 삼키며 운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맛있는 아이스티와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애시드 재즈,

    이런 한가로운 여름밤이 도대체 얼마만이야~!

    그때 내 행복한 상념의 끄트머리를 잡아채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데?” 젠장. 잠시 잊었군.
    나는 친구의 고민상담을 들어주기 위해 슬리퍼에 머리를 질끈 묶은

    차림으로 광화문 네거리 야외테라스에 나와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친구는 사귄지 한달 쯤 된 새끈한 남자친구와의 첫날밤을 목전에 두고 고민 중이었다.
    말랑말랑 촉촉한 삼순이 커플의 사랑얘기를 보다가 지갑하나 달랑 들고 허겁지겁 그 자리에 나간 건
    금방이라도 4차선 도로에 뛰어들 것처럼 절박했던 친구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친구가 애처로운 톤으로 ‘걔한테... 실은 처녀 아니고 나름대론 선수였다고, 나한테 한 수 배우는 기분으로 만나면 안되냐고 확, 털어놓을까?’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나는 집에서 느긋하게 현사마의 매력에 빠져 어푸어푸 헤엄치고 있었을 거였다.

    친구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아이스티가 담긴 유리잔에 스트로를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내가 물었다.

     “자는 게 문제가 되니?” 본인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친구가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걘 내가 처녀인줄 안단 말이야. 진지하게 사귀어보고 싶은 남자를 만났는데 이런 일로 신경전 벌이기가

    싫은 거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위기를 넘기고 싶은 거지. 이해하지?”     
     
     
     ‘처음...’ 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들
    암, 이해하지. 이해하고말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 남자를 붙잡고 싶은 거라면 눈 딱 감고 소설을 쓰면 된다.
    도덕적으로 그럴 순 없다고 체머리를 흔들 요량이면 애시당초 이런 고민은 하지 말던가.

    이미 뚜껑따서 몇 숟가락 퍼먹은 아이스크림 통에 우유를 부어 얼린들 그것이 어찌 개봉 전의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될 수 있으리.  
    아아, 하지만 누구나 처음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죽어도 그렇게 될 순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에게만은, 그 순간만큼은 처음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믿어라, 그리하면 너의 과거는 사라질 것이다’ 풍의 잠언도 아닌 것이 남자친구에게 어설프게 주절주절 처음을 강조했다간 꼼짝없이 딱 걸리게 돼있다. 남녀관계에서 말(言)처럼 두 얼굴을 가진 소통법도 없다. 당신이 말하는 것을 남자들이 모두 믿을 거란 착각은 버리는 게 좋다.

     

    아래 언급하는 몇 가지 팁은 사랑하는 사이에선 쓰지 말 것을 권고한다.

     

    당신이 만일 내 친구처럼 여러 남자를 거쳐왔다면(거기, 당신! 아닌 척 시치미떼지 마셈. 스무 살 이상이고, 처녀총각 사이였으며, 콘돔을 사용했다면 수십 번을 거쳤어도 잘못한 건 아니니까), 그러다 문득 말이 잘 통하고 눈에도 확 들어오는 남잘

    만나 모처럼 가슴이 쿵쾅거린다면, 사랑인지 아닌진 모르겠으나 최소한 이 남자에게 여러모로 괜찮은 여자로 보이고 싶다면 참고할 것.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래와 같은 어설픈 방법을 쓴다면 당신의 남자는 십중팔구 분노와 질투와 슬픔에 가슴이 찢겨 당신에게 눈도 맞추지 않은 채 “내가... 처음이... 아니구나?”라는 말을 낮게 읊조릴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당신의 속눈썹 떨림까지도 사랑스러워 미치겠는 그가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 당신의 사소한 제스처 따위 눈치못챌 줄 알았나부지? 아래의 치팅(cheating)은 남녀가 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남녀끼리는 법으로 금지돼있다.

    무슨 법? 바로 나, 야한 여자의 법.
    어쨌던동, 때는 바야흐로 새끈한 남자와의 첫날 밤. 처음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왔다면 숙지하시라. 

     

     

    [내숭의 법칙]

     

    1. 반쯤 열어라 -

    보다 정밀한 알리바이를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몰라요” 풍의 백치미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드라마만 봐도 전날 밤

    술에 떡이 돼서 호텔 방에 들어간 남녀가 아침이 되면 어깨를 반쯤 드러낸 채 경악하고 놀라는 장면이 허다하다.
    하물며 영화마다 문제의 응응응 비스무리한 장면이 없으면 초등학생도 화를 내는 세상이다.
    "어머, 아무리 술이 취해도 어떻게 남자가 자기 몸을 탐하는 걸 모를 수 있을까요?’ ‘제 친구가 그러는데요...
    처음엔 정말 아프데요’ 등 머저리같은 대사는 안하느니만 못하다.
     
    잊었나본데 당신은 이미 처녀가 아니다.

    지나치게 역할에 감정몰입하는 것은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남자에게 ‘순도 100% 버진(virgin)임’을 선언하고(혹은 구라치고) 싶다면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음에 몸을 맡기고

    저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전 정말 이 나이까지 뭐했나 몰라요. 정말 한심하죠? 후훗...’과도 같은 아리송한 멘트를 날려라. 
    이 주옥같은 대사는 남자로 하여금 알 듯 모를 듯, 닫힌 듯 열린 것 같은 색다른 탐험욕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아울러 전희

    장치로도 그만이다. 
     
     
    2. 살짝 물어라 -

    당신들 두 사람은 몇 잔의 알콜과 뻔한 탐색과 그럴 듯한 연기력을 주고받으며 묵언의 합의 하에 불야성의 모텔 촌에 입성, 방에 들어왔다. 남자가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고 창문이 잘 닫혀있는지 확인한 다음,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릴 때까지

    가급적 움직이지 말자.
    어색한 척 한답시고 욕실과 방 구석구석을 살피며 ‘아아.. 이렇게 생겼구나’ 했다가는 곧추선 남자, 곧바로 수직하강한다.

    오도방정 떨다가 당신도 모르게 ‘어머! 이 욕조엔 거품기능이 안되나봐요? 에이, 후졌당’ 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자. 남자가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먼저 씻을래요?’하는 순간 이렇게 말하라.

    ‘우리, 오늘 이후로 서로 모르는 사이인 거예요, 약속해줘요’ 이게 먼 소리? 어안이 벙벙한 남자의 머리가 잽싸게 회전하는

    동안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이렇게 쐐기를 박는 거다. ‘이런 식으로 여자가 될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당신이 싫었다면 안왔어요. 부담가지란 얘기 아니니까 오해말아요. 그냥 모른 척 해줘요’.

    남자는 부담갖지 말라는 당신의 말에 더욱 부담을 갖게 되고, 부담의 무게만큼 당신의 연기력은 제대로 먹혀든다.

    팁 한 가지!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투두 오어 낫투두를 고민하는 눈치라면 사귀게 될 경우 편집증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고,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걱정말라는 식이라면 오히려 사귈 경우 당신의 충복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높다.

     

    3. 엉덩이에 힘을 줘라 -

    여기서부터 짧고 간결한 실전학습.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홀랑 뒤집어쓰고 눈만 빼꼼이 내놓는 짓은 위험하다.

    적장을 노려보는 논개처럼 오버하면 되레 남자들의 짜증만 불러일으킨다. 브라는 됐고, 팬티 한 장만 단정하게 꿰입고

    가지런히 누울 것. 남자가 다가와 슬쩍 슬쩍 애무를 하고 입술을 갖다대고, 손을 허벅지 사이로 넣을 때까지 절대로!

    엉덩이를 들지 마라. 남자가 팬티 가장자리를 훑다가 슬쩍 잡아내릴 때 예전습관대로 엉덩이를 살짝 들어 그의 수고를

    덜어주는 멍청한 짓을 했다간 다된 밥에 비듬터는 격이다. 남자가 용쓰는 게 안타까워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감는달지,

    허리를 비틀어가며 그의 피스톤작용을 상승시킨달지, 리드미컬한 호흡을 그의 쉬에 숑숑 분달지 하는 짓은 삼가라.

    가급적 뻣뻣하게, 무표정하거나 적당히 양미간을 찌푸릴 것. 하지만 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이미 경험한 당신에겐 디테일한 표정까지 컨트롤하라는 것은 좀 그렇겠지? 대신 표정을 들키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주고

    목을 콱 끌어안아라. 지금까지의 연기에 대한 포상이자, 승리의 자축 세레모니다.


    4. 입닫고 가슴을 열어라 -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연기했는데 남자가 ‘너 처음 아니지?’ 해버린다면 속으로 창피해서 정말 죽고 싶겠지?

    일이 끝난 후가 비로소 감정연기가 절실한 대목이다. 첫날밤을 보낸 후 정강이가 아파서 며칠을 못걸었다느니,

    시트에 장미꽃잎 같은 훈장이 얼룩졌다느니 하는 말은 모두 ‘그때 그때 사람마다’ 다르다. 당신의 첫날 밤이 어땠는지

    아스라이 반추해보자. 티는 안나지만 뭔가 정말 중요한 것을 영영 잃어버린 것 같은 설움과 함께 괜한 자유로움이 얽혀

    한동안 희비의 쌍곡선을 형성했던 기분. 혹은 생각보다 시시하고 아무렇지 않아서 엄청 실망했던 기분. 새록새록 떠오르지? 그리고 지금 당신이 누워있는 이 시간이 새로운 첫 기록처럼 느껴지지? 그렇다면 오늘이 당신의 첫날이다.

    물론, 당신의 머리를 괸 자신의 팔이 저릿저릿 아픈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그 남자가 당신의 첫 남자지!
    당신처럼 생각 많은 여우에게 이처럼 멋진 마인드컨트롤이 어딨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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